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집안에서 차례나 제사가 때가 되면 멀리 나가있던 친척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밀린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 상례이다. 이때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지만 대체적으로 어느 집이나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식혜(食醯)이다. 식혜는 밥을 엿기름으로 삭힌 음료로 단맛이 나기 때문에 감주(甘酒)라고도 하는데, 생선에 쌀밥을 넣어 숙성시켜 만든 식해(食?)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글자를 쓸 때 잘 구별해야 한다.

 

 

식혜의 주된 재료는 보리의 싹인 엿기름이다. 보리는 일반적으로 가을에 심어 겨울 봄을 지나 초여름에 수확하는 곡식으로 4계절의 기운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마늘, 달래, 파, 염교 등과 같은 훈채류를 제외하고는 겨울을 지내는 대부분의 채소나 곡물에는 서늘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보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더위를 먹어 갈증이 심한 조갈(燥渴)이나, 감기에 걸린 다음의 고열(高熱) 그리고 어린아이의 심한 설사인 장염(腸炎) 등에 보리차가 응용된다. 현대의학에서는 설사인 장염(腸炎)의 원인을 장내미생물의 이상증식이라고 보지만 한의학에서는 설사를 대장(大腸)의 습열(濕熱)로 보기 때문에 열을 내려주는 보리차를 복용시킨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가 이유 없는 고열에 시달리거나 설사를 하는 경우 그리고 소화불량일 때에는 예전부터 보리차를 주는 것이 상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며느리가 처음 왔을 때나 어려운 손님이 오면, 처음부터 식혜를 주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 사람이 긴장하면 떡을 한 입만 먹어도 체하기 쉬우니 미리 식혜를 주어 긴장을 풀고 혹시 있을 지도 모를 식체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보리의 싹은 부득이하게 모유를 더 이상 주기 어려울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산 후 모유수유를 중단하면 남아있던 젖이 뭉쳐져 젖 몽우리가 생기며 유방이 아프게 된다. 이때 볶지 않은 맥아를 끓여 복용하면 뭉친 젖 몽우리를 풀어주며 자연스럽게 젖이 그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맥아의 강력한 소화력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따라서 본초강목(本草綱目)같은 의서에 의하면 ‘겉보리의 싹을 엿기름이라 하는데, 음식을 소화시키며 속을 편하게 다스리고, 냉기(冷氣)를 풀어내어 속이 더부룩한 것을 풀어준다. 막힌 위(胃)를 열어주며 곽란을 그치게 하고 답답증과 담음(痰飮)을 없애주며 뭉친 것을 풀어준다. 비위가 허한 것을 보(補)하며 장이 막힌 것을 뚫어 기운을 아래로 보내고 소화가 되지 않아 배에서 소리가 들릴 때 사용한다. 여러 가지 음식의 식적(食積)을 소화시킨다.’라고 엿기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상의학에서는 열이 많은 소양인이 체했을 때 식혜를 복용하면 매우 좋은 효과를 보기 때문에 권장되며 소화력이 매우 약하거나 속이 냉한 사람에게는 식혜를 따뜻하게 복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보리의 싹은 만성소화불량, 식욕부진, 비위가 허약한 사람에게 사용하여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소화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장기간 사용하면 체력이 약한 사람이나 냉성(冷性)체질인 소음인에게는 오히려 원기(元氣)를 손상시킬 수가 있다.

 

 

그리고 임신한 사람에게는 보리의 싹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보리의 싹에 뭉친 것을 풀어주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태아에게 오히려 해가 될까 염려해서 금기시하고 있다. 태아에게는 임부의 모든 기운이 집결되어야 하는데 이를 방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 Recent posts